유교
유교는 교육기관을 잘 기억해야 합니다. 교육기관은 시험에 매우 잘 출제됩니다.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이 전성기를 누릴 수 있도록 그 토대를 만든 사람이 소수림왕이었습니다. 소수림왕은 왕권 강화를 위해 여려가지 개혁을 강행하는데, 그중 하나가 태학을 설립한 것입니다. 태학은 중앙교육기관입니다. 지방에도 경당이 있었으나 이는 시험에 잘 나오진 않습니다. 고구려의 중앙교육기관인 태학만 잘 기억해 두면 됩니다.
마찬가지로 발해의 중앙교육기관으로는 주자감이 있었고, 통일신라에는 국학, 고려에는 국자감이 있었습니다. 또 조선에는 성균관이 있었습니다.
백제에도 중앙교육기관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기록에 남아있진 않습니다. 백제는 유학이 많이 발달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유학을 연구하는 오경박사도 존재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백제의 왕인은 일본에 논어와 천자문을 전해주었습니다.
신라의 임신서기석은 임신년에 한 약속을 기록한 돌입니다. 신라의 청년들이 열심히 공부해서 여기까지 끝내자라는 내용이 비석에 담겨있습니다.
통일신라 전기에는 신문왕이 왕권 강화를 위해 국학을 설립했습니다. 왕권을 강화시키기 위해 진골귀족들을 누르고, 그 자리에 6두품들을 기용했습니다. 그중 한 인물이 원효대사의 아들인 설총입니다. 설총은 화왕계를 써서 왕에게 바쳤습니다. 또 이두를 정리하였습니다. 이두란 당시에 훈민정음 같은 문자가 없었기 때문에 한자의 음을 딴 것을 말합니다.
통일신라 후기에는 원성왕 때 독서삼품과를 만들었습니다. 이것은 신라 귀족들에게 책을 읽힌 다음에 시험을 보고 품계를 매기는 것을 말합니다. 고려와 조선시대에 있었던 과거시험의 전신이라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통일신라 말기는 왕권이 매우 약했던 시기로 당시 귀족들의 반발이 만만치 않았을 것입니다. 결국 독서삼품과는 실현되진 못 했습니다. 왕권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기에 6두품들도 제대로 된 대접을 받지 못했습니다. 대표적인 인물로 최치원이 있습니다. 최치원은 중국의 빈공과에 합격했을 정도로 매우 유능한 수재였습니다. 그런 그가 시무책을 올렸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골품제의 벽이 매우 단단했던 시대였습니다.
유교의 핵심은 교육기관들 입니다. 고구려의 태학, 통일신라의 국학, 발해의 주자감, 고려의 국자감, 조선의 성균관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역사
현존하는 우리나라의 가장 오래된 역사서는 고려시대 때 김부식에 의해 만들어진 삼국사기입니다. 그 이전 시대들의 역사서들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단지 존재했다는 기록만 남아 있습니다. 보통 역사서는 그 시대의 전성기를 기록으로 남기고 싶을 때 쓰였습니다.
고구려에는 신집이 있었는데, 이것은 영양왕 때 기록된 것입니다. 영양왕은 수의 침략을 물리치던 자랑스러운 시기를 기록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백제에는 서기가 있었습니다. 이것은 근초고왕 때 쓰인 것으로 당시는 백제의 최고 전성기 시대였습니다. 그리고 신라에는 국사가 있었습니다. 신라 진흥왕 때 쓰여진 것으로 진흥왕은 관성성 전투에서 성왕을 죽이고, 한강을 차지했던 인물이었습니다.
도교
도교는 쉽게 얘기하면 산신령, 불로장생과 같은 신선들의 이야기입니다. 죽어서 신선이 되고 싶은 욕망들이 종교화 된 것입니다. 도교의 근거가 되는 문화유산의 사진들이 시험에 잘 출제됩니다.
고구려의 고분벽화에는 사신도가 그려져 있습니다. 사신은 주작, 백호와 같은 사 방위를 지키는 신들을 말합니다. 백제에는 산신이 그려진 산수무늬벽돌과 금동대향로가 있습니다. 금동대향로에는 봉래산 같은 곳에서 신선들이 머리도 감고, 악기도 연주하고, 낚시도 하고 있는 모습들이 그려져있습니다. 이것은 부여, 사비에서 발견되었습니다.
불교
우리 역사에서 불교를 빼놓고는 역사를 설명할 수 없습니다. 대부분이 불교문화유산으로부터 나왔기 때문입니다. 불교는 외래종교로 중국을 통해 들어왔습니다. 고구려, 백제, 신라는 왕권 강화를 목적으로 불교를 수용했습니다.
고구려는 소수림 왕 때 변화를 시도할 목적으로 중국 전진으로부터 수용했습니다. 백제도 근초고왕 이후 침류왕 때 중국 동진으로부터 수용했습니다. 하지만 신라는 중국을 통해 들어올 수 있는 길이 막혀있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고구려를 통해서 불교가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신라는 이차돈의 순교를 통해 법흥왕 때 어렵게 수용이 되었습니다. 삼국시대의 불교는 귀족 불교의 성격이 강했습니다.
통일신라 전기의 불교역사에서는 꼭 기억해야 할 승려들이 있습니다. 원효와 의상 그리고 혜초입니다. 원효와 의상에 얽힌 유명한 설화가 있습니다. 원효는 의상과 함께 불법을 찾아 같이 유학길에 오르던 중에 밤늦게 갈증을 느끼고 한 바가지에 담긴 물을 마시게 됩니다. 맛있게 물을 먹은 원효는 다시 잠을 청하고 다음날 일어납니다. 그런데 그 바가지는 해골이었고, 그 안에 든 것은 썩은 물이었습니다. 이를 통해 원효는 큰 깨달음을 얻습니다. 모든 진리는 자신의 마음속에 달려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깨달은 원효는 유학을 바로 마치고, 돌아와서는 백성들 속으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귀족의 권위의식을 내려놓고 백성들과 불교를 맘껏 얘기할 수 있는 승려로 거듭났습니다. 백성들과 춤추고 노래했으며(무애가), 모든 것은 마음으로부터 나온다는 일심사상을 가르쳤습니다. 또 불교가 너무 어려우니 쉽게 이해시키기 위해서 아미타 신앙을 갖고 왔습니다. 죽고 나서 가는 세계를 극락이라고 하는데, 그 세계를 관장하는 부처가 바로 아미타입니다. 아미타만 외치면 극락세계에 갈 수 있다고 가르치면서 불교의 대중화를 이끌었습니다. 민중들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얻은 원효는 실천운동가인 동시에 학자였습니다. 그는 항상 모든 것들은 하나로 통한다는 원융회통사상을 얘기했습니다. 극락세계를 얘기하는 정통신앙을 강조했고, 모든 것은 조화롭게 하나로 된다는 십문화쟁론을 저술했습니다.
원효와 달리 의상은 계속 유학길에 올랐고, 화엄사상을 발전시켰습니다. 또 부석사를 창건했습니다. 혜초는 왕오천축국전을 저술했는데, 이것은 불법을 구하기 위해서 인도까지 가는 여정을 담은 것입니다.
원효는 아미타신앙 의상은 관음시앙이었습니다. 부처님은 여러 종류가 있는데, 그중 극락세계를 관장하는 부처님이 아미타, 현재 살고 있는 사람들의 소원을 들어주는 부처님이 관음이었습니다. 의상의 관음신앙은 현재의 문제를 해결해 주고 원효의 아미타신앙은 죽고 나서 미래를 해결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통일신라말기, 중앙에서는 진골 귀족 간의 왕위다툼으로 지방이 전혀 통제되지 않고 있었습니다. 이때 지방에서는 호족들이 장군과 성주로 성장을 했습니다. 그들이 선호했던 종파가 바로 선종입니다. 누구나 참선을 하면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논리는 누구나 왕이 될 수 있다는 논리와 일맥상통했고, 곧 골품제를 깰 수 있는 논리였기 때문입니다. 호족의 후원을 얻은 선종은 9개의 산에 사찰들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9 산선문입니다.
불교역사를 정리하면, 중국에서 들어왔고, 이것은 중앙집권을 강화하는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후에 통일신라시대 때 원효, 의상, 혜초에 의해서 정리가 많이 되었고, 통일신라 말기 때는 호족들의 후원을 받으면서 선종이 많이 성장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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