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능력시험공부

챕터12. 고대의 문화

퀸하트 2024. 2. 9. 2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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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분

무덤은 굉장히 보수적인 성격을 갖고 있습니다. 아무리 개성과 다양성을 존중한다 해도 무덤의 형태까지는 반영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민족의 계통성을 찾을 수 있는 좋은 근거가 됩니다. 결론적으로 보면, 고구려와 백제의 무덤 형태는 비슷하지만 신라의 무덤 형태는 달랐습니다. 이를 통해 신라만 다른 계통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백제는 고구려의 지배층이 내려와서 세운 나라였기 때문에 무덤의 양식도 자연스레 비슷해졌습니다.

 

고구려 초기의 무덤 형태는 돌무지무덤이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장군총입니다. 피라미드식으로 돌을 쌓아서 올린 형태인데, 돌 한 변의 길이가 1m가 넘는 것도 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돌무지형식에서 굴식돌방무덤의 형태로 바뀌었습니다. 굴처럼 생겨서 문을 열고 들어가면, 입구가 있고 관이 놓여있는 널방이 있는 형태입니다. 그리고 관 주변에는 부장품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입구가 있다 보니 도굴꾼들에 의해 도굴되기 십상이었습니다. 그래서 고구려 무덤에서는 비교적 도굴하기 어려운 벽화들이 많이 발굴되었습니다.

장군총

백제도 돌무지 무덤에서 굴식 돌방무덤의 형태로 바뀌어 갑니다. 대표적인 것으로 석촌골 고분군이 있습니다. 백제의 역사는 한강에서 출발했습니다. 석촌동은 돌이 많은 곳이라는 뜻입니다. 오늘의 서울 잠실 쪽에 있는데, 원래는 아무것도 없는 황무지였으나 무덤돌이 무너지면서 그 돌들이 널리 퍼지게 되어 오늘날 석촌동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이 중 가장 큰 무덤은 한 변의 길이가 50m가 됩니다. 이것은 운동장의 절반에 해당하는 크기입니다. 이 무덤은 백제지역에서 가장 전성기를 이루었던 근초고 왕의 무덤이 아닐까 추정되고 있습니다. 무령왕릉의 무덤은 벽돌무덤입니다. 이것은 중국남조의 형식이었습니다. 또 무령왕릉 내부로 들어가면 관은 일본에서 가져온 것이었습니다. 이를 통해 백제는 외국과의 교류가 많았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릉과 총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무덤의 주인을 알 수 없는 경우에는 총으로 불리게 되고, 그 무덤의 주인을 알 경우에는 릉으로 불립니다. 이제까지 발견된 무덤들은 거의 다 도굴되었으나 무령왕릉은 온전히 보전되어 있었습니다. 

신라의 무덤 양식은 돌무지덧널무덤으로 입구가 없습니다. 때문에 도굴의 위협으로부터도 안전할 수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무덤은 천마총입니다. 그래서 신라의 문화유산은 비교적 많이 발굴되었습니다. 천마총은 가장 화려한 금관도 발굴되었지만 최초로 회화가 발견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그 회화의 이름을 따서 천마총으로 이름 붙여지게 되었습니다. 

통일신라의 무덤은  굴식돌방무덤형태입니다. 대표적으로 김유신의 묘가 있습니다. 발해는 벽돌무덤형태로 정혜공주 묘에서 돌사자상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통일신라와 발해의 무덤은 잘 출제되진 않습니다.

 

 

과학기술

하늘의 질서를 아는 것은 왕위와 관련이 있었습니다. 언제 농사를 지어야하는지 그 법칙을 알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늘이 곧 시계였습니다. 고구려의 천문도는 조선에 천상열차분야지도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백제는 철을 다루는 기술이 탁월하였습니다. 이 기술은 지금의 반도체 기술과도 맞닿아있습니다. 이것을 잘 보여주는 것이 근초고왕시대에 일본에 주었던칠지도입니다. 신라는 선덕여왕 때 첨성대를 만들었습니다. 가야는 철제 갑옷, 덩이쇠 등 철 수출을 많이 하였습니다. 통일신라의 과학기술을 보여주는 것으로는 상원사 동종이 있습니다. 서양의 종은 알림의 기능이라면 우리나라 동종은 부처님의 목소리를 뜻했습니다. 그래서 소리가 굵고 넓게 퍼지는 것이 특징입니다. 이것은 현존하는 종 중 가장 오래 된 종입니다. 

 


건축

황룡사 9층목탑은 선덕여왕 때 만들어졌지만 황룡사는 진흥왕 때 지어졌습니다. 통일신라의 건축물은 동궁과 월지, 안압지, 석굴암과 불국사가 있습니다.

 


삼국의 교류

삼국은 고립되있는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주변국들과의 교류가 활발했습니다. 일본은 군사력에서 앞서갔다면 삼국은 문화적인 면에서 압도했습니다. 남아있는 흔적들을 살펴보면, 문화를 상호 교류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일본 아스카문화입니다. 금동 미륵보살반가사유상과 고류사 목조 미륵보살반가사유상은 소재만 다를 뿐 외형적인 모습이 매우 유사합니다. 같은 사람이 만들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고구려의 혜자는 쇼토쿠 태자의 스승이었습니다. 일본 법륭사에는 담징의 금당벽화가 그려져있습니다. 또 수산리 고분벽화와 다카마쓰 고분벽화를 보면 입고 있는 옷이 비슷했습니다.
백제 왕인은 일본에 논어와 천자문을 전달했고, 아직기는 한학을 전파하였습니다. 백제는 일본과의 교류가 굉장히 긴밀했던 나라입니다. 백제가 멸망했을 때도 일본은 정권을 걸고 백제를 도왔습니다. 백제인이 일본에 가서 절을 많이 세우기도 했습니다. 때문에 백제의 가람(사찰)은 많이 소실된 우리나라보다 일본에서 더 잘 볼 수 있습니다. 신라도 조선술, 축제술을 일본에 전파하였습니다. 이것으로 한인의 연못이 유행하기도 했습니다.
가야도 스에키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이것은 쇠처럼 단단한 그릇을 뜻합니다. 온도를 높이 올려줘야 흙의 성분이 변해 더 단단한 그릇이 되는데 가야인들이 이 불을 다루는 기술이 탁월하였습니다. 통일신라는 하쿠오 문화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일본뿐만 아니라 서역과도 교류를 하였던 증거들이 남아있습니다. 우즈베키스탄에 가면 아프라시압 궁전 벽화 속에서 고구려인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또 각저총에서는 씨름하고 있는 그림이 나왔는데, 이 그림 속 인물은 한 명은 고구려인이었으나 한 명은 서역사람이었습니다. 이것을 통해 이 당시도 외국인이 살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프라시압 궁전벽화


신라에서는 보석이 박혀있는 보검, 유리그릇들이 발견되었습니다. 이것은 페르시아 쪽에서 온 것으로 당시 국제무역항이었던 울산항을 통해 교류되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통일신라의 원성왕릉에서는 외국인 상이 발견되기도 하였습니다.
이 파트에서는 이러한 문화유산에서 추론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지를 묻는 문제가 잘 출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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