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부터는 중세시대입니다. 왜 삼국시대를 고대시대라 부르고, 고려는 중세시대라고 할까요? 그 기준은 바로 자유입니다. 고대사회는 철저하게 폐쇄된 신분제에 의해서 움직이던 사회였습니다.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도 신분에 의해서 모든 것이 결정되는 사회였습니다. 하지만 중세부터는 신분제가 아닌 실력에 의해서 자신의 꿈을 펼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고려시대는 신분제가 아닌 과거제에 의해서 움직였습니다. 시험 봐서 합격하면 관직에 나갈 수 있었습니다. 신분에 의해서만 돌아가는 사회가 아닌 실력도 인정되는 사회가 바로 중세 고려시대입니다.
고려시대는 시대구분을 먼저 해야합니다. 고려전기와 후기로 나눌 수 있는 분기점이 있습니다. 바로 1170년의 일어났던 무신정변입니다. 군인들이 난을 일으킨 것인데, 이것을 기점으로 전기와 후기로 나뉩니다.
그 시대를 이끌고 있는 역사적 주도세력이 있습니다. 신라시대는 진골 귀족이었습니다. 그리고 고려 전기는 호족이 이끌었습니다. 고려는 호족들에 의해서 세워졌기 때문입니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은 기득권세력이 되는데, 이들을 문벌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이 문벌세력은 초심을 잃으면서 무신들에 의해 역사 속에서 퇴장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전기가 끝나게 되고, 무신들이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몽골 칭기즈칸이 쳐 들어왔습니다. 고려는 결국 항복하였고, 몽골이 세운 원나라의 간섭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이때 그들에게 빌붙어 성장하는 세력을 권문세족이라 불렀습니다. 그들은 후기의 기득권 세력이 되었습니다. 또 시간이 지나면서 고려말기에는 신진사대부라는 비주류들이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권문세족도 퇴출되고, 신진사대부들에 의해서 조선이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태조 왕건은 호족들과 손을 잡고 호족연합으로 고려를 세웠습니다. 여러세력과 손잡으면서 출발했기 때문에 왕권은 약했습니다. 태조 왕건의 가장 중요한 과제는 민생을 안정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세금을 깎아주고, 흑창을 만들었습니다. 봄에 곡식을 빌려주고 가을에 갚도록 한 진대법은 고구려 고국천왕이 만든 역사상 최초의 구휼제도인데, 그것을 이어받은 것이 흑창제도였습니다.
태조 왕건은 융합과 포용의 정치를 이어갔습니다. 그가 선택한 방법은 바로 가족을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경쟁세력과도 가족을 이루었습니다. 그 대표적인것이 사성제도입니다. 왕의 성씨를 내려주는 것이었습니다. 이 결혼정책으로 당시 태조왕건의 부인만 29명이었고, 아들은 28명이었습니다. 태조 왕건은 훗날 분란이 일어날 것을 대비해 어떤 이에게 왕위를 계승할 것인지 등이 적힌 훈요 10조를 남기기도 했습니다. 또 역분전을 만들어 개국공신들에게 역할에 따라서 토지를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지역의 세력들에게 사심관이라는 자리를 주어 그 지역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면 실세에게 책임을 지게 했습니다. 또 기인제도를 만들어 호족의 자제들을 개경에 데려왔고, 반란이 일어나면 인질로써 사용하였습니다. 고려는 고구려와 연결되는 나라입니다. 때문에 고구려의 수도였던 평양 서경을 매우 중시 여겼고, 서경을 중심으로 북진정책을 펼쳐나갔습니다.
혼란스러운 조정 속에서 광종이 왕위에 올랐습니다. 광종은 7년동안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신하들의 말을 잘 듣는 고분고분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광종은 개혁정책 하나를 꺼내 들었습니다. 국가의 재정이 어려우니 불법으로 노비된 자들을 조사해서 양인으로 돌려 주자는 노비안건법이었습니다. 노비는 세금을 내지 않지만 양인은 세금을 내기 때문입니다. 노비들은 호족들의 재산이었지만 양인들이 많아져야 국가 재정이 풍성해지고 국가가 안정될 것이라며, 이것을 밀어붙였습니다. 힘 있는 왕이 아니었기에 신하들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통과시켰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광종의 큰 그림이었습니다. 광종은 두 번째 개혁으로 과거제를 실시하겠다고 선포하였습니다. 고려의 장관으로 외국인 쌍기를 등용해서 과거제를 밀어붙였습니다. 신라말기에도 원성왕의 독서삼품과가 결국 실현되지 못한 것처럼 이번에도 신하들의 원성이 자자하였습니다. 처음과 달리 광종은 돌변했습니다. 반대하는 신하들을 그대로 숙청해 버렸습니다. 노비안건법으로 호족들의 군사력이 약화된 상태였기 때문에 고려 태조 왕건과 함께 고려를 세운 개국공신 집안들을 손쉽게 박살 내버렸습니다. 그래서 광종을 빛광이 아닌 미치광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는 관리들의 등급대로 옷을 달리 입히는 공복제를 통해 서열을 잡아놓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황제로 칭할 것을 명하며 광덕과 준풍이라는 연호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피의 숙청을 통해 진정한 일인자의 모습으로 등극한 광종덕에 왕한테 반할 수 있는 세력이 사라지고 국정은 안정을 찾게 되었습니다.
안정화가 되면서 성종때는 국가의 기틀이 만들어졌습니다. 중국의 제도를 도입 해 2성 6부 체제를 완성시켰습니다. 고려의 독자적 기구로는 도병마사가 있습니다. 고려 500년 동안은 끊임없이 전쟁을 했기 때문에 고려시대의 군사회의 기구인 도병마사는 매우 중요했습니다. 나중에는 도병마사가 도평의사사로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결혼식등의 순서를 정하는 식목도감이라는 회의 기구도 있었습니다. 또 낭사와 어사대가 모여서 회의를 하는 언론기구인 대간이 있었습니다. 대간에서는 왕명을 사인해 주는 서경, 간언 하는 간쟁, 왕명을 거부할 수 있는 봉박이 행해졌습니다. 언론의 기능을 했던 조선의 삼사와는 달리 고려의 삼사는 회계의 기능만 담당하였습니다.
지방에는 각 호족 귀족들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최승로의 시무 28조를 통해 최초로 지방에 관리들이 파견되기 시작했습니다. 최승로는 6두품이었던 최치원의 혈통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지방 12목에 관리들이 파견되었고, 이것이 5도와 양계로 정리되었습니다. 국경선은 두 개의 계로, 안쪽은 5도로 나뉘었습니다. 5도를 담당하는 관리를 안찰사라 부르고, 양계를 담당하는 관리를 병마사라 불렀습니다. 그리고 이 병마사들을 도병마사가 관리했습니다. 전국에 지방관들을 다 파견하진 못했기 때문에 없는 곳은 향리들이 자치적으로 다스렸습니다. 향, 부곡, 소의 특수행정구역은 이사할 수 있는 권리가 없었고 세금을 더 많이 내야 했습니다. 그리고 중앙군은 2군 6위,가 지방군은 주현군과 주진군이 파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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