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란 말이 있습니다. 그 사례는 역사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삼국시대라 불리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이야기를 지금부터 해 볼 것입니다. 이들은 어떤 나라였을까요? 고구려는 군사강국이었습니다. 그리고 백제는 문화강국이었습니다. 백제는 중국과의 선진문물 교류가 활발했기 때문에 굉장히 화려한 나라였습니다. 반면에 신라는 홀로 고립되어 있었습니다. 교류할 수 있는 루트가 마땅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고구려나 백제를 통해서 무언가를 받아야만 하는 위치에 있다 보니 쉽지 않았습니다. 때문에 고구려 백제에 비해 신라는 가장 후진적인 나라였습니다. 그런데 가장 후진적인 국가라고 생각했던 신라가 결국은 삼국을 통일하게 됩니다. 이것이 앞으로 알아볼 고대국가들의 스포일러입니다.
이전 포스팅에서는 여러 나라의 성장을 살펴보았습니다. 부여와 고구려의 경우 연맹왕국체제로 왕을 중심으로 한 사출도와 제가 회의가 있었습니다. 이제는 그다음 단계로, 싸우는 과정 속에서 흡수되고 멸망시키고 커지는 모습들이 만들어지면서 결국 크게 삼국이라는 형태가 만들어지게 됩니다. 그 삼국이 바로, 고구려 백제 신라입니다. 여기에 가야도 있었지만 4국 시대라고 하기에는 가야는 존재감이 많이 없었습니다.
고구려
대표적인 수도는 국내성이지만 후에 평양으로 천도합니다. 다시 한번 얘기하지만 고대국가에서는 왕들의 업적이 가장 중요합니다. 700여 년간 이어진 고구려의 역사는 출발, 변화, 전성기, 쇠락기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2세기, 태조왕은 옥저를 정복합니다. 그 다음 왕인 고국천왕은 5부를 행정단위로 바꿉니다. 5 부족 연맹체제에서 시간이 지남에 따라 왕권이 점차 강해지게 되자, 왕은 각각의 자치권을 회수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는 각각의 부를 행정단위로 연결해 버렸습니다. 지금의 대한민국이란 틀에 경상도 전라도가 존재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 이전의 연맹체제의 느슨한 모습을 딱 하나로 묶은 것입니다. 고국천왕의 업적 중 진대법은 시험에 잘 출제되므로 꼭 기억해두어야 합니다. 진대법은 사회구휼제도로 오늘날 기초수급자에게 정부가 지원해 주듯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는 제도들의 시발점이라 볼 수 있습니다.
고구려 백제 신라 중 가장 먼저 중앙집권을 시도한 나라가 고구려였지만, 전성기가 가장 먼저 오진 않았습니다. 오히려 제일 먼저 위기를 겪게 됩니다. 4세기에 고대국가의 특징은 중앙집권화라 볼 수 있는데, 고구려는 이 4세기에 휘청거리게 됩니다. 틀을 만들고 동시에 전성기를 얻은 것은 백제였습니다. 백제는 한강을 중심으로 엄청나게 성장하게 됩니다. 정복군주라 불리는 백제의 근초고왕이 고구려를 치게 되는데, 그때 고구려의 왕도 죽게 됩니다. 700년 고구려역사를 되돌아봐도 단 한 번도 외침에 의해 왕이 죽은 적은 없었습니다. 딱 한번, 백제 근초고왕에 의해서 빼곤 말입니다.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도전한 왕이 바로, 소수림왕입니다. 소수림왕의 위기타파 해법은 '변화'였습니다. 이제까지의 고구려를 다 내려놓고 새로운 고구려로 환골탈태시킨 것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불교를 수용한 것입니다. 불교는 본래 외래종교였습니다. 때문에 불교를 수용한다는 것은 지금까지 있던 의식을 바꾸는 것을 뜻했습니다. 그리고 율령을 반포하여 이제까지 있던 시스템도 싹 바꾸었습니다. 또 태학을 설립해 유학을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유학의 기본이 왕에 충성하고 나라에 충성하는 것인 만큼 이는 앞으로의 의지를 뜻했습니다. 그는 의식을 바꾸고, 시스템을 바꾸고, 의지를 만든 것입니다. 이것이 소수림왕이 위기를 벗어나는 방법이었습니다. 불교, 율령, 태학도 시험에 잘 나오는 만큼 꼭 기억해야 합니다. 소수림왕의 변화 정책은 훗날 고구려 전성기를 여는 토대가 되었습니다.
4세기, 위기 속에서 변화를 수용하고 극복한 고구려의 전성기가 드디어 시작됩니다. 광개토대왕의 이름은 토지를 넓게 개척한 왕이란 뜻입니다. 그의 연호도 영원한 기쁨이란 뜻인 영락이었습니다. 광개토대왕의 비석도 높이가 7m에 달했습니다. 이 당시 광개토대왕의 영향력이 얼마나 컸냐면 신라에 왜가 처들어 왔는데, 이들을 한방에 무찔렀습니다. 신라는 고마움의 표시로 광개토대왕의 이름이 들어간 호우명 그릇을 만들어 무덤에 묻기까지 했습니다. 신라에 침입한 왜를 격퇴하는 과정 중에서 고구려 군대가 경상남도 가야까지 갔는데, 이것을 계기로 금관가야는 쇠퇴하게 되었습니다.
광개토대왕의 아들 장수왕은 아버지의 영광을 기리기 위하여 광개토비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도읍을 평양으로 천도했습니다. 남쪽으로 밀고 내려가기 위해서였습니다. 장수왕이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천도한 것은 시험에 잘 나옵니다. 장수왕의 선택이 나비효과가 되서 주변국에 미친 영향력이 어마어마하기 때문입니다.
장수왕이 남하정책을 추진하자, 온조가 세운 백제는 결국 도읍을 빼앗기고, 지금의 공주인 웅진으로 천도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신라와 백제도 더욱 더 동맹을 강화하였는데, 이것을 나제동맹이라 부릅니다. 충주에 고구려비가 세워질 정도로 고구려는 엄청나게 밀고 내려왔습니다.
고대왕들의 숙명 중 하나는 바로 복수였습니다. 백제의 근초고왕이 고국원왕을 죽인만큼, 고구려도 백제의 개로왕을 죽입니다. 이로 인해 백제는 한성을 버리고 웅진으로 천도하게 된 것입니다. 5세기는 그야말로 고구려 전성기의 클라이맥스였습니다.
7세기, 수나라가 고구려를 침략합니다. 기록에 따르면 수황제는 100만 대군을 동원해 침략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고구려는 이를 다 막아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을지문덕의 살수대첩입니다. 살수대첩은 수에 맞서 싸운 전투입니다. 수가 금방 망하고, 그 뒤를 이은 것이 중국 역사상 가장 화려한 시대라고 불리는 당나라입니다. 고구려는 당나라의 공격을 막기 위해서 천리장성을 쌓았는데,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했던 연개소문이 이것을 관리감독 하였습니다.
당 태종이 친히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왔습니다. 하지만 안시성 싸움에서 고구려는 당 태종을 끝까지 추격해서 쫓아냅니다. 당 태종이 그의 아들에게 고구려와는 싸울 때가 아니라고 유언을 남길 정도였다고 하니, 그 당시 고구려의 위세가 실로 어마무시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고구려에게 당하면서 혼자 하면 안 되겠다 생각하고 있던 당나라에 신라가 접근해 옵니다. 그리고 나당연합을 맺은 신라와 당나라는 함께 고구려를 쳤습니다. 그러자 고구려의 평양성이 무너지게 되었고, 결국 고구려는 멸망하게 됩니다.
고구려 멸망 후, 경모장, 고연우, 안승에 의해 고구려 부흥운동이 계속해서 이루어집니다.
'한국사능력시험공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챕터5. 신라 / 가야 (0) | 2024.02.04 |
---|---|
챕터4. 백제 (0) | 2024.02.04 |
챕터2. 여러 나라의 성장 (1) | 2024.02.03 |
챕터 1. 선사시대 (구석기,신석기,청동기,철기시대) (2) | 2024.02.01 |
2024 한국사능력검정시험 일정, 효과적인 공부 방향 (4) | 2024.01.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