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 근세로 분류합니다. 삼국과 남북극 시대는 고대였고, 고려는 중세였습니다. 중세 고려는 고대의 폐쇄적인 신분제도에서 벗어나 광종 때 과거제를 실시하면서 실력을 인정해 주는 사회였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고대와는 다른 사회였습니다. 그래서 중세가 되었습니다. 조선이 근세가 된 것도 이와 같습니다. 조선시대는 중세 고려에 비해 좀 더 실력이 중심 되는 사회였습니다. 중세 고려는 여전히 음서, 공음전과 같은 신분제적인 질서가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면 과거시험을 안 보더라도 관직에 나갈 수 있는 길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근세 조선은 과거에 합격하지 못하면 조선의 지배층으로 인정해 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훨씬 더 실력이 존중되는 사회였습니다.
조선시대도 조선전기와 조선후기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그 분기점이 바로 1592년에 터진 임진왜란입니다. 조선은 신진사대부에 의해서 세워졌습니다. 신진사대부는 성리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조선은 성리학의 나라가 되었습니다. 신진사대부와 신흥무인세력들이 만나게 되었는데, 신흥무인세력의 대표가 바로 이성계였습니다. 그들은 당시 고려 말을 책임지고 있었던 권문세족을 치고 성장하였습니다. 요동정벌을 명 받았던 이성계가 위화도까지 갔다가 회군을 했습니다. 군인이 명령을 어기고 돌아오는 것은 역모로 죽던지 쿠데타로 성공하던지 둘 중 하나였습니다.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을 성공하고, 최영과 우영을 날리고 권력을 장악하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권력을 잡은 이성계는 권문세족의 경제적 기반을 몰수하기 시작했습니다. 권문세족은 산과 강을 경계로 하는 어마어마한 대농장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 대농장을 몰수하는 법안이 과전법이었습니다. 이 과전법으로 신진사대부들의 기반이 만들어졌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정치와 경제를 장악한 후 조선이라는 나라를 건국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건국과정 중에서 신진사대부들이 나뉘게 되었습니다. 개혁하는 것은 좋으나 존재하는 고려왕실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나라를 세운다는 것은 성리학적으로 맞지 않았기 때문에 대다수의 신진사대부들이 반대하였습니다. 이들이 정몽주를 중심으로 하는 온건파 세력입니다. 반면에 정도전을 중심으로 한 소수의 신진사대부들은 왕 씨에서 이 씨로 성을 바꾸는 역성혁명을 주장하였습니다. 결국 혁명파와 온건파의 권력투쟁에서 혁명파였던 정도전과 이성계가 승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정도전을 중심으로 한 신진사대부가 쭉 끌고 나가게 되었습니다. 경복궁의 이름도 정도전에 의해 지어지게 되었습니다.
정몽주를 중심으로 한 온건파는 그 과정 중에서 죽임을 당했고, 남아있던 온건파들은 조선 건국에 참여하지 않고 낙향하였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자신들만의 세상을 구축했습니다. 그들은 향촌 자치를 추구하였습니다. 반면, 조선을 건국한 혁명파 세력들은 중앙에서 자신들의 권력을 만들어 나갔습니다. 이 두 세력이 조선에 공존하였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가면서 중앙 집권을 추구하던 온건파 세력이 기득권이 되면서 훈구파로 변질되었고, 결국 그들은 역사를 이끌어 갈 동력도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비주류였던 향촌에 무리 지어 살던 이들이 사림파가 되면서 훈구파를 치고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사림파는 훈구파를 제거하고, 조선건국 100년 만에 역사의 주도세력이 되었습니다.
조선 전기 왕들의 업적을 살펴보겠습니다. 태조는 정도전과 함께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입니다. 정도전의 꿈은 유학의 나라, 재상 중심의 나라를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왕을 바꿀 수는 없었기 때문에 성군이 아니더라도 재상에 의해 움직이는 정치라면 문제가 없다고 보았습니다. 이성계도 이것을 묵인해 주었습니다. 그러면서 한양 도성이 설계되고, 과전법이 시행되었습니다. 그리고 유교의 나라를 만들기 위해 불씨잡변, 조선경국전을 편찬하였습니다. 조선경국전은 조선이라는 나라를 운영하는데 있어 필요한 법전으로 성종 때 완성되었던 경국대전의 근간이 되었습니다. 불씨잡변은 부처의 잡소리란 뜻으로 불교의 국가였던 고려시대에서 이제는 유학의 나라가 됐음을 시사했습니다. 그런데 이성계의 아들인 이방원이 왕자의 난을 이끌어서 정도전을 죽이고, 새롭게 권력을 장악하였습니다. 그는 정도전과 달리 왕 중심의 나라를 추구하였습니다. 그래서 6조 직계제를 만들어 재상과 협의하지 않고, 바로 왕명을 명령하고 시행하였습니다. 그리고 왕권에 도전하는 것들을 다 없애버렸습니다. 그는 왕권 강화를 위해 사병들을 타파하고, 중앙에서 지방을 통제하기 위해 호패법을 만들어 남성들에게 신분증과 같은 호패를 채웠습니다. 또 신문고를 설치해서 억울한 일이 있으면 고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개미자(개미년에 만든 금속활자)로 책을 편찬하였습니다. 태종 이방원의 여러 업적 중 가장 큰 업적은 자신의 첫째 아들 양령을 끌어내리고 셋째 아들 충령을 앉힌 것이었습니다. 충령은 세종대왕이 되었습니다.
세종은 태종이 피의 숙청을 너무 많이하였기 때문에 더 이상 그럴 필요가 없다고 보았습니다. 그는 신하들과의 토론을 통한 정치를 하기 위해 재상들이 있는 의정부 서사제를 시행하였습니다. 이것은 재상들의 결재를 용인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집현전을 세워 현명한 인재들을 모아놓고 훈민정음을 만들었습니다. 또 태조의 개미자와 같이 갑인자를 만들었습니다. 현재 한반도 지도의 모습은 세종 때 거의 만들어졌습니다. 그는 4군과 6진을 설치해서 개척하였고, 지금의 대마도인 쓰시마섬을 정벌하였습니다. 세종의 업적은 시험에 자주 출제되기 때문에 무조건 기억해 두어야 합니다. 세종의 아들 문종도 세종을 닮은 성군이었습니다. 그러나 몸이 약해 일찍 죽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어린 아들이 왕위에 올랐는데 문종의 동생이었던 수양대군이 단종을 죽이고 권력을 장악하였습니다. 이것이 계유정난입니다. 이때 단종을 죽이는 것을 찬성한 인물 중 하나가 신숙주였습니다. 그는 세종이 매우 아끼던 산하였습니다. 반면에 죽을 때까지 세조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사육신입니다. 이렇게 왕위를 차지했기 때문에 세조는 다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6조 직계제를 부활시켰습니다. 그리고 집현전은 폐지시켰습니다. 경국대전도 만들기 시작하였는데, 이것은 뒤를 이은 성종이 완성시켰습니다. 성종 때 사실상 조선의 기틀이 거의 완성되었습니다. 성종은 다시 집현전을 복원해서 홍문관을 만들었고, 이곳에서 왕과 재상들이 토론하는 경연, 왕세자와 신하들이 토론하는 서연을 하였습니다. 성종 때에 이르러서야 조선사회가 안정화되었습니다.
조선의 행정조직을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중앙은 의정부와 6조 체제, 지방은 8도 체제였습니다. 의정부에 있는 재상들은 영의정, 우의정, 좌의정이라 불렀습니다. 6조는 실무를 담당하는 행정부처였습니다. 이조는 국가의 인사권을 담당했고, 호조는 재정, 예조는 예법을 담당하였습니다. 병조는 국방과 병사 일을 담당했고, 형조는 범죄와 법률, 공조는 토목공사나 공업에 관한 일을 맡아했습니다. 조선의 행정조직은 왕권을 강화시키기도 하고 견재하기도 하면서 균형을 맞추고 있었습니다. 왕권을 강화시키는 조직은 6조 직계제였습니다. 6조의 판서들로 하여금 모든 업무를 왕에게 직접 보고하도록 하였기 때문에 의정부의 기능이 유명무실했습니다. 승정원은 왕의 비서기능을 하는 기구로 도승지가 이끌었습니다. 의금부는 금부도사가 다스렸는데, 왕의 전속 법 집행기구로 주로 역모 사건을 다루었습니다. 왕권을 견제하는 기구로는 의정부 서사제가 있습니다. 대표적인 왕이 세종입니다. 세종은 재상들과 얘기하면서 정국을 이끌어 나갔습니다. 그리고 3사가 있습니다. 고려의 3사는 회계만 담당하고 언론은 담당하지 않았습니다. 반면, 조선의 3사는 사간원, 사헌부, 홍문관이 있는데 이들은 언론의 기능도 함께 담당했습니다. 사간원은 간쟁을 담당했고, 사헌부는 검찰의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홍문관은 왕과 신하들이 토론하는 경연의 기능을 하였습니다.
지방은 8도 체제였습니다. 고려시대는 5도 양계체제로 5도는 행정적인 성격이 강하고, 양계는 군사적 성격으로 이원화되어 있었으나 조선은 8도로 일원화되었습니다. 8도를 다스리고 있는 곳이 관찰사입니다. 관찰사들은 지방의 수령들을 관리하였습니다. 8도 밑에는 부, 목, 군, 현으로 나뉘었습니다. 부, 목, 군, 현을 다스리고 있는 사람들이 수령들 즉, 사또들이었습니다. 이 사또들이 하는 일을 수령 7 사라 하였는데, 이들은 행정 사법 군사를 모두 담당했습니다. 수령의 역할 중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는 그 마을의 인구를 늘리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스무 살이 됐는데도 불구하고 시집과 장가를 가지 못한 사람들이 많으면 관직에서 물러나야 했습니다. 수령들을 향리가 보좌하였습니다. 고려시대 때는 향리가 지방을 다스리는 실질적 지배 세력이었지만 조선의 향리는 전국에 지방관이 모두 파견되었기 때문에 실질적인 향리의 역할이 거의 없었습니다. 왕이 직접 파견한 관찰사와 수령이 다스리면서 중앙집권을 추구했습니다. 그런데 그 마을에는 조선 건국에 반대하고 향촌으로 낙향했던 무리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이 사림파입니다. 왕이 직접 파견한 관리들과 사림파 사이에는 긴장 관계가 형성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경재소를 만들어 사림파들을 감시했습니다. 반면에 사림들도 유향소를 만들어 지방관리들을 감시하는 등 민간자치의 지도자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더 시간이 흘러서 사림들은 서원을 중심으로 뭉쳤습니다. 그리고 마을의 농민들을 통제하기 위해 향약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사림파들은 향촌에서 자신들의 자치적인 질서를 계속해서 만들어 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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