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세기를 이끌고 있었던 역성혁명파의 후손들이 훈구파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결국 사림에 의해서 교체가 되었고, 16세기 이후부터는 사림들이 주도세력으로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림들도 권력을 장악하게 되면서 여러 파로 나뉘게 되었습니다. 기본적으로 사림의 인원은 많은데 반해 중앙 관직의 수는 한정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서로 뜻이 맞는 사람들끼리 뭉치게 되었는데, 이것을 붕당이라 불렀습니다. 대표적인 당은 동인당과 서인당이 있었습니다. 동인당의 우두머리는 김효원이었습니다. 그가 한양에서 동쪽에서 살고 있었기 때문에 동인이라 하였습니다. 서인당의 우두머리는 심의겸으로 서쪽에서 살고 있어서 서인이라 불렀습니다. 이들은 인사권을 쥐고 있는 자리를 두고 권력투쟁을 벌였습니다.인사권은 이조에 있는 전랑이란 자리가 갖고 있었습니다. 결국 동인이 전랑을 실질적으로 차지함으로써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습니다. 동인당이 권력을 차지하고 있는 이때 정여립이란 인물이 서인에서 동인으로 옮겨갔습니다. 서인 쪽에서는 정여립이 괘씸해 보였습니다. 그래서 그를 끌어내릴 기회를 계속 노렸습니다. 그리고 정여립이 시골에 내려가서 무술연습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 그가 역모를 일으키려 한다고 왕에게 고했습니다. 이렇게 되면서 정철을 중심으로 한 서인 출신들의 권력투쟁이 전개되었습니다. 이것을 기축옥사입니다. 4차례의 사화에서 죽어나간 총 인원보다 정철이 동인을 쳐서 죽인 숫자가 훨씬 많았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서인이 권력을 쥐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정철은 선조에게 세자책봉을 건의했습니다. 그런데 선조는 이것을 못마땅하게 받아들였고, 정철을 중심으로 한 서인들을 다 내쳐버렸습니다. 그래서 졸지에 동인이 다시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습니다. 동인들은 서인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를 두고 또 두 당파로 갈리게 되었습니다. 북인은 서인들을 철저히 응징하고자 하였고, 남인은 정치보복은 보복을 남길뿐이라며 넘기고자 하였습니다. 그리고 북인은 선조의 아들 광해군을 지지했습니다. 광해군은 정실부인에서 낳은 아들은 아니었습니다. 정실부인에겐 아들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선조는 늦은 나이에 다시 정실부인을 맞았고, 아들도 낳게 되었습니다. 그가 영창대군이었습니다. 하지만 광해군은 자신이 왕위에 오르기 위해 이복동생인 영창대군을 죽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어머니인 인목대비도 유폐시켰습니다. 이로 인해 광해군을 지지하던 북인이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습니다.
당시는 중국의 명나라가 쇠하고 후금이 성장하고 있는 때였습니다. 이 관계 속에서 광해군은 중립외교를 택했습니다. 또 임진왜란 직후에는 대동법을 시행 해 백성들의 세금을 감면시켜 주었습니다. 그러나 도덕적 결함 때문에 결국은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인조반정입니다. 인조반정을 주도했던 세력은 서인이었습니다. 서인 세력이 중심이 되어 남인과 함께 광해군을 몰아내면서 북인들은 쫓겨나게 되고 서인이 다시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남인과 서인만 남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때 또 예법논쟁이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상복을 입는 기간을 두고 권력투쟁이 벌어진 것입니다. 이것을 예송논쟁이라 하였습니다. 그리고 사활을 건 투쟁 끝에 예송논쟁은 남인의 승리로 끝을 맺게 되었습니다. 이때가 숙종 때였습니다.
숙종은 14세에 왕위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그는 조선역사상 가장 카리스마 있는 왕이었습니다. 장자계승의 원칙으로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어떤 왕보다도 정통성을 갖고 있었습니다. 서인은 왕과 조선의 선비들이 같다라는 이념을 갖고 있었고, 남인은 왕은 특별한 자라 보았습니다. 때문에 숙종은 서인들을 괘씸하게 여겼고, 서인의 우두머리인 송시열에게 사약을 내렸습니다. 숙종은 이처럼 자신에게 충성하는 세력에게 힘을 몰아주었습니다. 그리고 마음에 안 들면 또다시 몰아내기를 반복하였습니다. 숙종은 이 같은 환국정치로 자신의 권력을 극대화시켰습니다. 그전까지는 남인과 서인이 공존하는 모습이었지만 숙종 때부터는 다 깨지게 되었습니다. 어느 한쪽이 죽어야 살 수 있었기 때문에 왕에게 환심을 사기 위해서 싸우는 형국이 되었습니다. 이 환국 과정 속에서 남인계열이었던 장희빈이 사약을 먹고 죽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장희빈과 남인이 몰락하자 최종적으로는 서인만 남게 되었습니다. 서인은 다시 장희빈의 아들 경종을 지지하는 소론과 숙종의 또 다른 아들인 영조를 지지하는 노론으로 나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영조를 지지하는 노론이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습니다.
영조는 왕위에 오른 후 붕당끼리의 싸움을 중지하자는 뜻에서 음식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이 음식이 탕평채입니다. 그리고 성균관에도 당의 영향을 받지 말라는 뜻에서 탕평비문이라는 비석을 세웠습니다. 영조는 탕평정치를 시행했습니다. 그래서 송시열같은 당의 거두인 산림을 인정하지 않았고, 그 분당들이 모여있는 집안 교육기관인 서원도 정리하였습니다. 또 경국대전의 속편인 속대전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균역법을 시행해 세금을 감면해 주었습니다.
영조는 자신의 아들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였습니다. 그래서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가 왕위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정조는 왕권 강화를 위해 규장각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규장각에서 초계문신제를 시행 해 과거에 합격한 젊은 선비들을 모아 직접 교육을 시켰습니다. 조선시대는 나이 많은 신하가 왕을 가르치는 모습이 일반적이었지만 정조는 반대로 신하들을 가르칠 정도로 학문적인 지식이 매우 뛰어났습니다. 정조는 이것으로 자신의 지지세력들을 키워나갔습니다. 그리고 장용영이라는 자신의 군대도 만들었습니다. 또 아버지 사도세자의 명예회복을 위해서 수원 화성을 건축했습니다. 이때 배다리와 거중기도 만들어졌는데, 이것을 만든 자가 초계문신인 정약용이었습니다. 정조는 대전통편을 통해 법전을 다시 한번 정리하였고, 신해통공을 시행하였습니다. 신해통공으로 시전상인들만의 특권 상행위가 비시전상인에게도 허용되게 되었습니다.
정조가 갑자기 죽게 되고, 어린아들인 순조가 왕위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영조와 정조를 겪으며 신하들은 현명한 왕이 세워지면 자신들의 입지가 좁아진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강원도에서 농사짓고 있던 철종을 세우는 등 허수아비 왕들을 직접 택하여 세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순조, 현종, 철종 때는 소수 가문에 의해서 권력이 장악되는 세도정치가 이어졌습니다. 이들은 비변사에서 모여서 권력을 장악했는데, 대표적인 가문이 풍양조 씨와 안동김 씨 가문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부정부패도 난무하게 되었습니다. 관직을 돈으로 사고파는 매관매직이 성행하자 세금체계가 완전히 무너지게 되었습니다. 삼정이 문란해지자 19세기에는 서북지역 차별로 인한 홍경래의 난이 일어났고, 진주에서는 임술 농민봉기가 일어났습니다. 이 같은 혼란의 시기가 계속되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삼정을 다시 바로잡는 삼정이정청을 만들기도 했으나 효과를 보지는 못했습니다. 이렇게 조선왕조 500년도 점차 기울어지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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