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능력시험공부

챕터23. 조선의 경제

퀸하트 2024. 2. 19.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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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능력시험에서는 경제와 사회 파트는 많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너무 비중을 두고 공부할 필요는 없습니다. 나온다면 주로 세법이 나옵니다. 세금 체제가 어떻게 바뀌었는지를 기억해 두면 됩니다. 농사짓는 사람들은 크게 3가지 세금을 내야 했습니다. 전세, 공납, 역이 바로 그것입니다. 전세는 토지에서 나오는 생산량의 일부를 내는 것이고, 공납은 그 지역의 특산물을 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역은 자신의 노동력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어떤 기준으로 냈는지는 시대에 따라서 달라졌습니다. 지금부터 그 달라진 과정을 알아보겠습니다.

 

토지제도와 세금제도의 변화

전세 중 하나인 과전법은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기 이전에 위화도 회군을 통해서 최영을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한 후 경제력을 장악하기 위해 만들었던 제도였습니다. 과전법은 국가를 위해서 일한 공무원들에게 어떻게 토지를 지급할 것이냐의 기준과 농민들에게 얼마만큼 세금을 거둘 것인가에 대한 기준을 정했습니다. 백성들한테 세금을 떼는 기준은 세종 때가 되면 공법으로 바뀌었습니다. 전분 6 등법, 연분 9 등법으로 나누어 과전법의 규정을 좀 더 세세하게 만들었습니다. 전분은 토지의 비옥도에 따라서 6개의 등급으로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연분은 농작의 풍흉을 9개의 등급으로 나누었습니다. 따라서 총 6*9=54개의 경우의 수가 존재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더 단순화가 되어 최저세율제로 바뀌었고, 인조 때는 영정법이 만들어졌습니다. 영정법은 영원히 정한다는 뜻으로 1 결당 4-6두를 내는 것으로 규정하였습니다. 1 결은 대략적으로 학교 운동장 크기이고, 4-6두는 쌀 반가마 정도의 양이었습니다.
백성들이 내는 세금 중 하나인 공납은 특산물 내는 것입니다. 그 기준은 집집마다 똑같이 할당을 해주었습니다. 집이 부자이던지 아니던지 상관없이 동일했습니다. 하지만 수확량에 관계없이 특산물을 매번 똑같이 내는 것은 여간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자 이 불편함을 해소해 주는 사람이 등장했습니다. 바로 방납업자입니다. 방납업자에게 돈을 주면 대신 특산물을 구해서 내주는 식이었습니다. 하지만 방납업자가 지방관과 결탁하면서 점점 폐단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정해진 값보다 더 높은 값을 부르기 일쑤였고, 그래서 사또에게 직접 내려고 하면 사또는 방납업자 것 외엔 받지 않았습니다. 이 폐단을 해결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바로 광해군 때 만들어진 대동법입니다. 대동법은 한국사능력시험에 가장 많이 나오는 것 중 하나입니다. 지역마다 내는 특산물 기준이 다르다 보니 각종 부정과 비리가 난무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표준화하기 위해 쌀로 공납을 대체하는 것이 대동법입니다. 대동법은 1 결당 12두를 내도록 했습니다. 즉, 땅을 더 많이 가지고 있을수록 더 많이 내야 했습니다. 토지를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한테는 증세가 되었고, 토지가 비교적 적은 백성들에게는 감세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토지를 많이 가진 양반들의 조세저항이 심했습니다. 결국 대동법이 전국에 확산되는데 100년이 걸렸습니다. 대동법을 다루는 곳을 선혜청이라 불렀습니다. 광해군 때 처음 시행 된 대동법은 시행되기 전부터 이원익이라는 사람이 건의를 많이 하였고, 김육이라는 사람에 의해 확산되기 시작했습니다.

대동법 전에는 임금의 수라상에 전국 각지의 특산물들이 올라왔습니다. 그런데 이제 쌀밖에 없게되자 그 쌀을 가지고 그 지역의 특산물을 사 오는 상인들이 생겨났습니다. 이들이 바로 공인입니다. 그들은 대량으로 특산물들을 몇 백 상자씩 사들였습니다. 때문에 이제는 단순히 먹거나 사용하기 위해서가 아닌 납품을 위해서 농사를 짓거나 물건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면서 상품화폐경제가 발달하게 되었습니다. 방납의 폐단으로 시행된 대동법으로 인해 상품화폐경제가 발달됐다는 것은 시험에 정말 잘 나옴으로 꼭 기억해 두어야 합니다.

시험에 두번째로 잘 나오는 것은 균역법입니다. 영조의 탕평정책을 다룬 문제에서 곁가지로 잘 출제됩니다. 역은 국가에 노동력을 제공하는 것으로 군대 가는 것이 이것에 포함됩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남자들이 군대를 안 가려고 했습니다. 그러자 다른 사람에게 돈을 주면서 대신 갔다 오게 하거나 사또에게 뇌물을 주고 면제를 받는 일이 생겨났습니다. 돈을 주고 대신 갔다 오게 하는 것을 대신이라 하였고, 돈을 주면서 빼 주는 것을 방군수포라 하였습니다. 원래 역은 1년에 두필씩 내도록 되어 있었지만 균역법은 이것을 1 필로 깎아주었습니다. 결작 1 결당 2두를 냈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점차 토지에 세금을 물리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줄어든 세금은 어장세, 염세, 선박세를 받아 보완했습니다. 또 벼슬을 명예직으로 내주고 돈을 걷는 선무군관포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양반들은 내지 않았습니다. 양반들에게는 군대를 안 가는 특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조선후기에 백성들이 내는 세금의 변화를 정리하면, 과전법에서 영정법으로 바뀌었고 공납에서 대동법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역에서 균역법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관리들에게 주는 월급은 어떻게 변화됬을까요? 통일신라 때는 녹읍을 폐지하고 관료전을 지급하였습니다. 그리고 고려시대 때는 전시과가 있었고, 조선시대 때는 과전법이 있었습니다. 과전법은 전 현직 관료들에게 다 주는 것이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돈이 부족해지자 세조 때 직전법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현재 일하고 있는 현직 관리들에게만 지급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명종 때는 그동안 토지에서 나오는 세금을 걷을 수 있는 수조권을 준 것을 없애고 오로지 녹봉만 주는 것을 실시하였습니다. 쌀과 옷감만 주었습니다. 관리들에게 주는 월급제도를 정리해 보자면 과전법에서 직전법으로 바뀌었고, 녹봉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농업, 상업, 수공업, 광업

조선후기가 되면서 모내기법이 일반화가 되었습니다. 모내기법은 모판에다가 씨앗을 뿌린 후 키운 다음에 옮겨 심는 방법입니다. 주로 가뭄에 약한 봄에 옮겨 심었기 때문에 저수지 시설이 있어야 가능했습니다. 조선후기부터는 저수지 기술이 많이 발달되었습니다. 모내기법이 일반화가 됨에 따라 생산력도 증가하게 되었습니다. 다섯 명이 하는 일을 한 명이 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광작이 가능해지자 농민층도 분화되기 시작했습니다. 다섯명 중 한명은 부자가 되고, 네명은 노동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쌀은 상품화가 됐습니다.  


도조법은 봄에 땅을 빌리는 사람과 지주사이에 맺는 계약으로 매년 수확량에 관계없이 일정한 소작료를 미리 정하는 제도입니다. 농사짓기 전에 계약을 맺었는데 그만큼 소작농들이 농사에 자신감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조선전기에는 농사직설이 있었다면 후기에는 농사집성이 있었습니다. 색경은 색다른 작물을 경작하는 방법을 써 놓은 농서로 담배 인삼 등 농가에서 농사에 필요한 필수적인 지식들을 기술하였습니다.

기본적으로 조선은 중농역상이었습니다. 농업은 장려하되 상업은 군자의 길이 아니라고 보았습니다. 종로에서 일하는 시전상인과 봇짐을 들고 옮겨 다니는 보부상이 있었습니다. 모두 국가에서 인정해 준 상인들이었습니다. 모내기법의 일반화로 생산력이 증가하자 남은 것으로 교환하기 시작했습니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농업이 발달함에 따라 상업도 발달하였습니다. 그래서 정조 때는 비시전상인들도 상행위를 할 수 있도록 신해통공을 하였습니다.

대동법에 발달로 공인이 생겨났고, 그들은 상품화폐경제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또 국가가 인정한 상인이 아닌 개별적으로 자유롭게 거래하는 사상들도 생겨났습니다. 고려시대 성종 때는 건원중보와 철전이 있었고, 고려 숙종 때는 해동통보가 있었지만 모두 유통시키는 데는 실패하였습니다. 활구나 은병정도만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나 조선후기에 들어서는 상품화폐경제가 발달됨에 따라 드디어 화폐가 제대로 유통되기 시작했습니다. 이 화폐가 상평통보입니다.  
농업이 발달됨에 따라 생산력이 증가하였고, 남은 물건들로 교환하기 시작하자 상업도 발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상업이 발달하자 국가가 인정하는 상인들, 개별적으로 활동하는 상인들 모두 활발히 활동하였습니다. 이 중 돈을 번 상인들이 나타났는데, 독점적 도매상인으로 도고라고 불렀습니다. 시전상인, 공인, 성공한 사상들이 도고가 되었습니다. 이들은 의주만상, 개성송상, 서울을 중심으로 한 경강상인, 동래 내상을 중심으로 생겨났습니다. 특히 개성송상은 인삼으로 중계무역을 해 돈을 많이 벌었습니다. 상인들은 주로 배를 이용해서 무역행위를 했습니다. 그래서 배가 들어오는 선상에서 무역이 많이 이뤄졌습니다. 그러다 보니 선상 및 보부상등의 상인들 사이에서 상품의 보관 및 전달 등을 담당하는 한편 숙박시설을 제공하는 객주와 여각도 생겨났습니다. 물건을 많이 팔려면 물건을 많이 만들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물건을 만드는 수공업자들도 발달하게 되어 관영수공업에서 민영수공업으로 발달하게 되었습니다. 또 상인이 독립된 수공업자들에게 원료나 도구, 임금 등을 지불하여 필요한 물품을 생산시키는 선대제도 발달했습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연료가 많이 필요해짐에 따라 광업도 발달했습니다. 상인들에게 돈을 투자받은 후, 노동자를 고용해 광산을 경영하는 전문 경영인들이 생겨났습니다. 이들을 덕대라고 불렀습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모습의 단초가 되는 것들이 조금씩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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