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능력시험공부

챕터24. 조선의 사회

퀸하트 2024. 2. 20. 1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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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제주도에서 대단한 여성이 등장했습니다. 그 여성의 이름은 김만덕이었습니다. 그녀는 조선시대 때 유명한 여성 경영인이었습니다. 육지에서 오는 곡물들을 제주도에서 팔고, 제주에서 나는 해산물들을 육지에 팔면서 거상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제주에 가뭄이 왔을 때 이제까지 벌었던 돈을 모두 풀어서 육지에서 쌀을 사 와 제주도민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이 김만덕의 이야기를 듣고 정조가 상을 주기 위해 소원을 물었습니다. 그러자 김만덕은 두 가지를 말하였습니다. 첫 번째는 임금을 만나는 것이고, 두 번째는 금강산을 가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그 당시 아녀자가 임금을 만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게다가 제주도 여성들은 출육금지령이 있어 제주도 밖으로 나갈 수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금강산은 양반들도 가기 힘든 곳이었습니다. 김만덕의 소원은 당시 조선 신분제의 한계에 도전하는 것들이었습니다.  

 

신분제

사회파트에서는 신분제가 가장 중요합니다. 기본적으로 조선은 양반, 중인, 상민, 천민으로 나뉘었습니다. 양반은 문반과 무반을 합친 것으로 공부하는 이들과 군인들이 이곳에 속했습니다. 중인은 양반들을 보좌해주는 하급관리로 양반인 사또를 보좌하는 향리 등이 여기에 속했습니다. 절대다수의 인구는 백성인 상민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가장 밑바닥에 천민들이 있었습니다. 천민 중 가장 밑바닥은 백정이었고, 대다수는 노비들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이 신분제도는 양난을 거치면서 변동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국가에 재정이 바닥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국가에서 돈을 확보하기 위해서 부농이 된 농민들에게 거래를 제안하였습니다. 일정한 돈을 받고 명예직 양반직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이때 양반이 되면 군대를 면제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것을 납속책이라 하였는데, 그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공명첩이었습니다. 이름이 비어있는 임명책이란 뜻이었습니다. 그러자 일반 상민들이 양반으로 신분상승하게 되면서 신분제도가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원래 조선에서의 양반인구는 전체의 7퍼센트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양반은 증가하고 상민과 노비가 감소하게 되었습니다. 신분제의 동요가 일어나자 양반들도 몰락하기 시작했습니다. 중앙에서 권력을 잡고 있는 권반, 향촌으로 내려온 향반, 완전히 몰락한 잔반으로 분화되었습니다. 중인들도 서얼과 전문직 중인으로 나뉘었습니다. 서얼은 첩의 자식이었는데, 정조는 이들을 귀하게 여겼습니다. 규장각에서 검서관직을 주었습니다. 대표적인 인물로 박제가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로인해 전문직 중인들의 동요가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백성들도 광작으로 부자가 된 부농과 임노동자로 나뉘었습니다. 그래서 기존의 양반과 새롭게 양반이 된 자들 간의 시비가 붙기도 했습니다. 이것을 향전이라고 불렀습니다. 천민들은 거의 노비들이었는데, 도망가기도 했고, 순조 때는 공노비들을 해방시켜주기도 했습니다.

 

 

종교

신분제가 붕괴된 이유에는 의식이 전환된 것이 가장 컸습니다. 양반이나 노비나 다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비판적 사고는 종교로부터 나왔습니다. 조선후기에는 천주교인 서학과 동학이 나왔습니다. 천주교에서는 모두 하나님 앞에서 평등하다고 보았습니다. 성리학적 사회가 뿌리부터 무너지는 의식의 변화가 천주교를 통해서 들어오게 된것입니다. 서학에서는 제사도 지내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성리학을 근본으로 하는 나라에서 제사를 지내는 것은 효의 출발이라 보았기 때문에 정조 때는 신해박해가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서학은 이처럼 우리 사회의 의식과 풍습을 완전히 흔들어놨습니다. 이것을 반대하기 위해서 만든 것이 동학입니다. 최제우가 만들었습니다. 인내천 사상으로 사람이 곧 하늘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을 하늘처럼 대하라고 가르쳤습니다. 동학에서 성경책과 같은 것이 동경대전이고, 찬송가와 같은 것이 용담유사였습니다. 이렇게 종교의 형태를 만들어냈습니다. 19세기는 세도정치 시기로 민란의 시대였기 때문에 정감록, 미륵신앙과 같은 새로운 시대를 얘기하는 예언서들이 등장하기도 했습니다.

 


사회정책

조선은 백성이 근본이 되는 민본국가였습니다. 백성들을 안정시키기 위한 기구로는 의창과 상평창이 있었습니다. 의료시설도 있었는데, 동서대비원, 혜민국, 동서활인서가 그것입니다. 활인서는 조선시대 도성 내 환자나 유량민을 구호하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반면에, 백성들을 통제하는 방법도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것으로 호패법과 오가작통법이 있습니다. 오가작통법은 다섯 가구를 한 단위로 서로 감시하고 통제하는 제도입니다. 그리고 향촌에 있는 양반들도 향약을 만들어 운영하였습니다. 그리고 향촌에서 자신들의 여론을 만드는 유향소도 만들었는데 이곳은 좌수와 별감이 관리하였습니다.

성종 때 경국대전을 만들었고 영조 때는 속대전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정조 때는 대전통편을 만들었습니다. 지방관을 사또라 불렀는데, 이 사또를 관리 감독하는 사람을 관찰사 수령이라 하였습니다. 이들은 조선 8도에 파견되었는데, 사법, 군사, 행정의 기능을 모두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2차 갑오개혁 때 재판소가 설치되면서 역할이 축소되게 되었습니다.

 


여성

신사임

고려시대 여성은 가정 내 지위가 높았습니다. 남성과 대등한 위치였습니다. 이 모습은 조선전기까지 이어졌습니다. 조선 전기의 대표적인 인물로 신사임당과 허난설현이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조선에서는 여성은 남자의 집에 가서 남자집의 대를 이어주는 것을 최선의 미덕으로 보았습니다. 그런데 신사임당은 여성으로서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렸고 지금도 예술가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조선 후기로 갈수록 여성의 지위는 떨어졌습니다. 대표적인 인물로 글머리 서두에 언급한 김만덕과 빙허각 이 씨의 규합총서가 있습니다. 규합총서는 여성들이 머무는 안채에서 써 내려간 글들을 모아놓은 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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