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전기와 조선후기는 1592년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나뉘게 되었습니다. 당시 조선의 외교는 사대와 교린이었습니다. 조선 전기만 해도 중국의 명나라가 있었습니다. 조선은 성리학의 나라로써 정통인 중국을 섬기는 것을 당연시 여겼습니다. 그래서 큰 나라를 섬긴다는 의미로 사대와 조공무역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웃나라들과는 교린정책을 펼치며 사이좋게 지냈습니다. 대표적인 이웃나라로 여진과 일본이 있었습니다. 강경책과 회유책을 고루 썼는데, 세종 때는 4군 6진을 개척하며 여진족의 땅을 빼앗아 영토를 넓히는 반면, 그들이 원하는 것이 쌀과 곡식임으로 무역소를 설치해서 이것을 주기도 하였습니다. 일본도 쓰시마섬을 정벌했지만 얼마 정도는 교역을 하겠다는 뜻에서 3포를 개항했습니다. 그런데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권력을 장악하면서 침입해 왔습니다. 이것이 임진왜란입니다. 임진왜란의 3대 대첩으로 이순신의 한산대첩, 김시민의 진주대첩, 권율의 행주대첩이 있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싸워서 이기는 장수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이겨 놓고 싸우는 장수였습니다. 완벽한 전술과 전략을 짜놓은 후 이길 수 있는 장소로 끌어내서 싸웠기 때문입니다. 일본은 신무기인 조총을 주로 사용하였고, 우리는 포를 주로 사용했습니다. 조총보단 포가 사정거리가 훨씬 길었기 때문에 이순신은 왜적들과의 사정거리를 반드시 띄워주고 싸웠습니다. 그래서 연정연승을 이룬 곳을 보면 대부분이 넓은 바다였습니다. 임진왜란 때 활약한 인물로 의병이었던 곽재우도 있습니다. 그리고 명나라도 조명 연합군으로 도와주었습니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잠깐의 휴전기에 들어서자 의정부에서 비변사로 체제를 바꾸었습니다. 비변사는 주로 군사 업무를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중앙은 5위 체제에서 훈련도감으로 바꾸었습니다. 그전까지는 의무병에 의해 움직였으나 이때부터는 훈련도감에서 돈을 주고 직업군인들을 양성하였습니다. 이렇게 재편한 후 전쟁이 다시 터졌는데 그것이 정유재란입니다. 이때 이순신 장군은 명량대첩에서 기적 같은 승리를 거두었지만 노량해전에서 전사하게 되었습니다.
전쟁의 여파로 명나라의 힘이 빠지기 시작했습니다. 반면, 만주쪽에서는 여진족의 후손들이 세운 후금이 새로운 신흥강국으로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성종의 뒤를 이어 광해군이 왕위에 올랐습니다. 광해군은 어느 쪽에도 강력한 줄을 서지 않는 중립외교를 보였습니다. 명나라가 임진왜란 때 도와준 것을 빌미로 후금과의 전쟁에서 도움을 줄 것을 청했습니다. 하지만 광해군은 후금에 맞서 싸울 경우 뒷감당이 될지 의문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일단 군대를 파견했지만 그 군대를 이끌고 있던 장수 강홍립에게 후금에 투항하도록 시켰습니다. 강홍립이 투항하자 명나라를 배신하는 것을 용납하지 못한 신하들은 광해군을 쫓아냈습니다. 이것이 인조반정입니다. 그리고 친명배금정책을 취하였습니다. 하지만 후금은 계속 성장하였고 또 다시 쳐들어왔습니다. 이것이 정묘호란입니다. 임금이 강화도로 피신까지 갔으나 결국은 항복하였고, 형제관계를 맺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청나라로 성장한 후금은 더 나아가 군신관계를 요구하였습니다. 조선이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자 또 쳐들어 왔는데 이것이 병자호란입니다. 강화도로 피신 갈 수 없게 바로 길을 끊어버리자 결국 인조는 남한상성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식량이 동 날 때까지 47일 간 항쟁하였습니다. 인조는 결국 삼전도에 나와서 항복을 했고, 이것을 계기로 소현세자를 비롯한 많은 인재들이 청나라로 끌려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소현세자는 죽고 그 동생 효종이 왕위를 물려받았습니다. 그리고 이 치욕을 갚기 위한 북벌론이 대두되었습니다.
간도와 독도도 기억해야 합니다. 숙종은 카리스마를 가지고 오랜 기간동안 집권을 하였습니다. 청과의 영토분쟁이 벌어지자 백두산에 경계를 정하는 비석을 세웠습니다. 이것이 백두산정계비입니다. 고종 때는 국경의 경계선상에 있는 간도에 관리사도 파견하였습니다. 하지만 1905년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이 박탈당한 탓에 일본이 청나라와 맺은 간도협약으로 간도는 청나라의 땅이 되었습니다.
임진왜란으로 단절됐던 외교가 광해군 때 다시 복원되었습니다. 일본에 통신사를 파견해서 선진문물을 전파하고 약부를 인정해 주었습니다. 나중에 강화도 조약 이후에 일본에 파견된 사절단을 수신사라 하는데 통신사와 수신사를 구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통신사는 우리의 우수한 문화를 일본에 전달해 주었다면, 수신사는 반대로 일본에서 서양의 문물을 보고 배워왔습니다.
독도를 지킨 인물로 안용복이 있습니다. 그는 어부였는데, 일본 사람들이 자꾸 울릉도와 독도에 와서 상행위를 하자, 이것을 항의하기 위하여 일본까지 직접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일본측으로부터 일본땅이 아님을 인정하는 서계를 받아냈습니다. 고종은 대한제국 칙령 제41조에서 독도가 우리 땅임을 다시 한번 확인하였습니다. 러일 전쟁이 전개되는 과정 속에서 일본이 독도를 다시 가져갔으나 지금은 다시 우리 땅으로 돌아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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