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는 무려 1000년의 역사를 갖고 있는 나라입니다. 지금의 경주에서 그 역사적 흔적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백제는 태조 무열왕 때 멸망하였고, 고구려는 문무왕 때 멸망하였습니다. 그리고 금관가야는 법흥왕 때 대가야는 진흥왕 때 멸망하였습니다. 이제 통일신라가 시작됩니다. 이렇게 삼국을 통일시킨 왕의 어깨는 힘이 굉장했을 것입니다. 대표적인 통일신라의 왕이 바로 신문왕입니다. 통일신라는 전기와 후기로 나누어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통일신라 전기부터 살펴보겠습니다.
태조 무열왕인 김춘추는 최초의 진골출신 왕이었고, 김유신, 나당연합과 함께 백제를 멸망시켰습니다. 그리고 그의 아들 문무왕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삼국을 통일했습니다. 이때부터 통치 시스템을 정비하는 모습들이 보입니다. 그중 상수리 제도는 각 지방의 유력자들을 경주에 오게 한 것으로, 쉽게 말해 왕권강화를 위한 인질 제도였습니다. 또 외사정을 파견해 지방을 감찰시켰습니다.
문무왕의 소원은 죽어서 동해의 용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나라에 대한 사랑이 매우 컸던 그는 용이 되어 나라를 수호하겠다는 유언을 남깁니다. 그의 아들 신문왕은 아버지께 감사한다는 뜻을 담아 감은사라는 절을 지었습니다. 감은사 터를 보면 기초공사 밑에 구멍이 뻥 뚫려있는데, 이것은 용이 된 아버지를 모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용에게 만파식적 피리를 선물받았다는 설화도 등장하는데, 이런 신화적인 모습들이 통일신라 초기의 모습들을 잘 보여줍니다.
시험에는 신문왕이 많이 출제되니 그의 업적을 잘 알아두어야 합니다. 신라에는 골품제라는 독특한 제도가 있었습니다. 골과 품으로 나눈 것인데, 골은 경주 김씨들이었고, 품은 경주 최 씨 집안들이었습니다.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도 품들은 고위지배층이 될 수가 없었습니다. 이 유리벽이 아주 견고하게 존재했습니다. 신문왕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서 진골세력을 대표하는 김흠돌 세력을 제거했습니다. 이것이 김흠돌의 난입니다. 시험에 자주 등장하니 꼭 기억해야 합니다. 김흠돌의 난을 진압하고, 통일신라는 전성기로 치닫습니다.
고구려의 제가회의, 백제의 정사암처럼 신라에도 귀족회의가 있었습니다. 바로 화백회의입니다. 그 귀족들의 우두머리가 상대등이었는데, 신문왕은 이 상대등의 힘을 약화시켰습니다. 그리고 왕과 친밀한 부서에 있는 집사부 시중의 힘을 강화시켰습니다.
진골 귀족들을 누르면 그 세력을 대체할 누군가를 썼어야 했는데, 그것이 6두품들이었습니다. 대표적인 인물로 원효의 아들인 설총이 있습니다. 설총은 많이 듣고 겸손한 왕이 되어야 한다는 화왕계를 써서 올렸습니다. 신문왕은 이런 사람들을 가까이했습니다. 통일신라 초기, 정권이 안정화될 수 있었던 이유는 이처럼 열린 사고 속에서 다양한 세력들을 포용할 수 있는 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왕권강화를 위해서 귀족세력의 대표 김흠돌의 난을 진압하고, 상대등의 힘을 약화시키고, 집사부 시중을 강화 시켰습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관료전을 시행했습니다. 관료전은 시험에 정말 잘 나오기 때문에 매우 중요합니다. 관료전은 쉽게 말해, 오늘날 공무원들은 국가를 위해 일하고 돈을 받는 것처럼 옛날에는 화폐가 없었기 때문에 토지를 받는 것을 말합니다. 정확히는 토지의 소유권이 아닌, 그 토지에 살고 있는 백성들이 내는 세금을 가질 수 있는 권리인 수조권을 받았습니다. 신문왕은 기존에 있던 녹읍을 폐지하고 관료전을 시행했습니다. 녹읍은 토지를 받는다는 점은 같지만 그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노동력까지 쓸 수 있었다는 점에서 관료전과 차이를 보입니다. 사람들은 곧 군사력으로도 전환될 수 있었기 때문에 왕의 입장에서는 굉장히 불안한 제도였습니다. 따라서 군사력으로 전환할 수 없도록 녹읍을 폐지하고, 관료전을 대신 지급 해 왕권을 강화시켰습니다. 이것은 신문왕의 개혁 중 가장 큰 개혁이었습니다.
고구려 영토 3개, 백제 영토 3개, 신라 영토 3개, 이렇게 9주를 만들고, 수도인 경주가 너무 한쪽에 치우쳐져 있는 것을 고려 해 그 역할을 해 줄 수 있는 5 소경을 만들었습니다. 또 고구려든 백제든 말갈인이든 출신에 구애받지 않고 인물들을 뽑아 9 서당이라는 중앙군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9개 주에 하나씩 지방 군을 파견했는데, 한산주는 너무 커서 2개의 정이 들어가서 10정이 되었습니다.
최고 교육기관인 국학을 설립 해 유학을 가르치고, 왕한테 자발적으로 충성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로서 신문왕은 정치경제사회문화의 모든 영역에서 왕권 강화의 기반을 구축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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