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챕터19. 조선의 건국과 체제정비

조선은 근세로 분류합니다. 삼국과 남북극 시대는 고대였고, 고려는 중세였습니다. 중세 고려는 고대의 폐쇄적인 신분제도에서 벗어나 광종 때 과거제를 실시하면서 실력을 인정해 주는 사회였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고대와는 다른 사회였습니다. 그래서 중세가 되었습니다. 조선이 근세가 된 것도 이와 같습니다. 조선시대는 중세 고려에 비해 좀 더 실력이 중심 되는 사회였습니다. 중세 고려는 여전히 음서, 공음전과 같은 신분제적인 질서가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면 과거시험을 안 보더라도 관직에 나갈 수 있는 길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근세 조선은 과거에 합격하지 못하면 조선의 지배층으로 인정해 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훨씬 더 실력이 존중되는 사회였습니다. 조선시대도 조선전기와 조선후기로 나누어 볼 ..

챕터18. 고려의 문화

불상 이름을 일일이 다 외우기보다 사진을 보고 고려시대임을 알 수 있으면 됩니다. 고려시대 초기에는 철불이 유행했습니다. 왜 철로 만든 불상이 유행했을까요? 전쟁이 끝났기 때문입니다. 전쟁 때 사용했던 무기들을 녹여서 불상을 만들었습니다. 대표적인 불상으로 하남 하사창동 철조 석가여래좌상이 있습니다. 또 대형 석불도 유행했습니다. 논산 관촉사 석조 미륵보살입상, 파주 용미리 마애이불입상, 안동 이천동 마애여래입상이 고려 때 만들어진 대형 석불들입니다. 마애여래입상은 바위 위에 얼굴만 얹어놨을 정도로 고려시대 불상들은 이전시대보다 매우 파격적이고 개성적인 것이 특징입니다. 고려 중기에는 석굴암 본존불과 매우 유사한 불상이 만들어졌습니다. 영주 부석사에 있는 소조 아미타여래좌상입니다. 부석사는 의상이 만든 ..

챕터17. 고려의 문화(유학, 역사서)

문벌시대가 되면서 국가가 운영하는 관학이 만들어졌습니다. 그런데 관학은 인기가 없었습니다. 사립학교가 인기가 더 많았기 때문입니다. 사립에서 시험도 더 많이 보고, 과거시험도 더 많이 합격시켰습니다. 그래서 광종 때부터 시작했던 과거에 합격하기 위해 사람들은 사립학교에 더 가고 싶어 했습니다. 최고의 사립은 최충이 세운 9제 학당이었습니다. 이 학당 출신들을 문헌공도라 불렀습니다. 국가에서는 사립학교가 더 인기 많은 것을 보고, 공교육을 강화시키기 위해서 장학재단인 양현고와 전문 7재를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사립학교가 더 인기가 많았습니다. 무신시대에 접어들어서는 칼의 시대였기 때문에 유학이 위축되었습니다. 그러다 고려말기가 되면서 원 간섭기 때 원에 빌붙어 권문세족들이 성장했는데, 이들은 신진사..

챕터16. 고려의 경제,사회

고려의 경제 사회는 시험에서 1문제 정도 출제됩니다. 시험에 자주 출제되는 핵심 용어들을 먼저 살펴보면, 고려의 토지제도 전시과, 고려의 국제무역항 벽란도, 고려의 화폐 활구와 해동통보, 고려의 물가조정기구 상평창 그리고 고려의 상행위 감독기구 경시서가 있습니다. 토지제도 고려의 토지제도에는 역분전이 있습니다. 고려 건국에 공을 세운 조신, 군사 등에게 임품과 공로에 기준을 두고 지급하였습니다. 그리고 경종 때는 전시과가 만들어졌습니다. 전시과는 고려시대 문무 관리들에게 지급하던 토지제도로 그 지위에 따라 전토와 시지를 지급하였습니다. 전시과의 전은 토지를 뜻하고, 시는 임야를 뜻합니다. 임야는 땔감을 얻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전시과는 죽거나 관직에서 물러나면 나라에게 토지를 반납해야 했지만 고위관리들은..

챕터15. 고려, 외세의 침략

역사상 외교를 가장 잘한 인물로 고려시대의 서희를 꼽습니다. 고려는 외침사가 엄청났던 나라였습니다. 10세기 11세기에는 거란족, 12세기는 여진족, 13세기는 몽골족, 14세기는 홍건족과 왜족이 쳐들어왔습니다. 강대국들의 침략이 엄청났음에도 불구하고 500년 동안 고려가 유지될 수 있었던 비결은 바로 고려의 외교였습니다. 거란은 발해를 멸망시킨 나라였습니다. 이 거란족이 세운 나라가 바로 요나라입니다. 거란족의 침입이 잦았기 때문에 광군이라는 특수군을 만들어서 거란족 침입에 대비했습니다. 또 나성을 쌓고 천리장성을 축조했습니다. 그리고 부처님의 힘을 빌려 막고자 하는 의지가 담긴 초조대장경도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거란은 계속해서 대대적으로 쳐들어왔습니다. 1차 침입 때 거란은 고려의 이북지역을 요구했습..

챕터14. 고려 후기

호족의 시대가 지나가고 정권이 안정화되었습니다. 숙청되지 않았던 호족들이 기득권이 되었습니다. 그들을 문벌이라 불렀습니다. 이들은 가족끼리 결혼하는 폐쇄적인 통혼을 하였습니다. 또 그들의 자녀는 문벌가문이란 이유로 음서와 공음전을 통해 시험을 보지 않고도 벼슬자리를 얻고 땅도 받았습니다. 이같이 권력을 독식함에 따라 사회가 제대로 운영되지 못하였고, 후에는 무신들에 의해 무너지게 되었습니다. 이자겸은 근친혼에 의해 엄청난 권력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는 왕의 장인이자 왕의 외할아버지였습니다. 이자겸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왕이 되고자 하였습니다. 이것이 이자겸의 난입니다. 이때부터 문벌사회가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독식하는 개경세력에 맞서 서경세력이 일어난 것입니다. 당시 문벌들은 안정된 사회 속에서 그 권..

챕터13. 고려 전기

지금부터는 중세시대입니다. 왜 삼국시대를 고대시대라 부르고, 고려는 중세시대라고 할까요? 그 기준은 바로 자유입니다. 고대사회는 철저하게 폐쇄된 신분제에 의해서 움직이던 사회였습니다.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도 신분에 의해서 모든 것이 결정되는 사회였습니다. 하지만 중세부터는 신분제가 아닌 실력에 의해서 자신의 꿈을 펼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고려시대는 신분제가 아닌 과거제에 의해서 움직였습니다. 시험 봐서 합격하면 관직에 나갈 수 있었습니다. 신분에 의해서만 돌아가는 사회가 아닌 실력도 인정되는 사회가 바로 중세 고려시대입니다. 고려시대는 시대구분을 먼저 해야합니다. 고려전기와 후기로 나눌 수 있는 분기점이 있습니다. 바로 1170년의 일어났던 무신정변입니다. 군인들이 난을 일으킨 것인데,..

챕터12. 고대의 문화

고분 무덤은 굉장히 보수적인 성격을 갖고 있습니다. 아무리 개성과 다양성을 존중한다 해도 무덤의 형태까지는 반영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민족의 계통성을 찾을 수 있는 좋은 근거가 됩니다. 결론적으로 보면, 고구려와 백제의 무덤 형태는 비슷하지만 신라의 무덤 형태는 달랐습니다. 이를 통해 신라만 다른 계통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백제는 고구려의 지배층이 내려와서 세운 나라였기 때문에 무덤의 양식도 자연스레 비슷해졌습니다. 고구려 초기의 무덤 형태는 돌무지무덤이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장군총입니다. 피라미드식으로 돌을 쌓아서 올린 형태인데, 돌 한 변의 길이가 1m가 넘는 것도 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돌무지형식에서 굴식돌방무덤의 형태로 바뀌었습니다. 굴처럼 생겨서 문을 열고 들어가면, ..

챕터11. 불교 문화

불상 사진을 보고 이것이 어느 시대인지만 알면 됩니다. 일일이 문화유산의 이름을 외울 필요는 없습니다. 삼국시대의 유물로는 금동 미륵보살반가 사유상이 있습니다. 보살 중에는 관음보살도 있고 미륵보살도 있습니다. 관음보살은 사람들의 소원을 들어주고, 미륵보살은 재림 예수와 같이 미래에 중생들을 구제해주기 위해 오는 보살입니다. 금동 미륵보살반가 사유상은 미륵이 가부좌를 틀고 생각하고 있는 동상입니다. 고구려에는 금동연가 7여년 여래입상이 있습니다. 금동으로 만들어졌으며, 연기 7년이 생겨져 있고, 부처님이 서 있는 모습입니다. 백제에는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이 있습니다. 바위에 3명의 부처님을 새겨놓은 것입니다. 미소를 짓고 있어 백제의 미소라고도 불립니다. 신라에는 경주 배동 석조여래삼존입상이 있습니..

챕터10. 유교, 도교, 불교의 역사

유교 유교는 교육기관을 잘 기억해야 합니다. 교육기관은 시험에 매우 잘 출제됩니다.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이 전성기를 누릴 수 있도록 그 토대를 만든 사람이 소수림왕이었습니다. 소수림왕은 왕권 강화를 위해 여려가지 개혁을 강행하는데, 그중 하나가 태학을 설립한 것입니다. 태학은 중앙교육기관입니다. 지방에도 경당이 있었으나 이는 시험에 잘 나오진 않습니다. 고구려의 중앙교육기관인 태학만 잘 기억해 두면 됩니다. 마찬가지로 발해의 중앙교육기관으로는 주자감이 있었고, 통일신라에는 국학, 고려에는 국자감이 있었습니다. 또 조선에는 성균관이 있었습니다. 백제에도 중앙교육기관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기록에 남아있진 않습니다. 백제는 유학이 많이 발달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유학을 연구하는 오경박사도 존재했다는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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